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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넘어 천년의 증거를 기대하며연구보고서 2023. 3. 28. 08:45반응형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그리 배웠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이었다. 10여 년 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어쨌
거나, 어린 눈에도 무량수전이 좋아 보였는데 그래도 시내 한복판에 버티고 선, 돌을 다듬어 지은 교회 건물이 훨
씬 멋져 보였다(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절대 아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서울로 갔는데 옛 궁궐을 보게 되자 고향 교회는 단박에 시시해졌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
장 높다는 삼일빌딩을 보느라 뒤로 자빠지도록 고개를 젖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남산으로 가는 길에 명동성
당을 보고는 정말 두 눈이 휘둥그레져 한동안 넋이 빠졌다. 어린 눈에도 세상 어떤 건물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기에(이 역시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수년 전부터 근대 건축물이 재조명받고 있다. 명동성당 같은 몇몇 유명 건축물이야 이전부터 문화재에 준해 보존
하는 데 공감했지만, 적산(敵産) 가옥 단지까지 재평가하는 움직임은 의외였고, 덕분에 고향에서도 새로운 관광
자원이 생긴 모양이다. ‘후생시장’이라 부르던 고향의 적산 가옥 단지는 어릴 적 인근 시군에서 가장 큰 고추 시장
으로 유명했다. 가을이면 잘 말린 붉은 고추가 작은 동산처럼 쌓이고, 어른 덩치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포대에 담
겨 전국 방방곡곡 팔려 나갔다. 그 매운 냄새 그득한 길로 학교를 다니고 뛰어놀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길가 평상에
서 잠시 숨을 돌리던 상인들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웠다.
나이 들어 술을 마시게 된 뒤로는 고향에 가면 또 그곳 어딘가에서 친구와 잔을 기울였다. 좁은 골목에 비라도 내
리면 바닥은 질척거리고, 낮고 기울어진 처마는 처량하기까지 한데도 그 비좁은 주점에 모여 앉은 까닭은 연탄불
위 석쇠에서 익어가는 돼지고기 연기 때문이었을까. 언젠가 방송국에서 고향을 주제로 촬영을 제의했을 때도 그
골목에 갔으니 진짜 추억은 낮고 좁은 곳일수록 깊고 진해지는지도 모른다. 못된 친구가 일찍 하늘로 여행을 가버
린 뒤로는 다시 찾지 않았는데, 새 단장으로 관광 자원이 되었다니 한번 찾아봐야 하나….
사실 우리 근대 건축물 대부분은 아픈 역사의 유산이다. 더구나 적산 가옥은 일제 강점기의 생생한 흔적이니 보존
보다는 개발의 대상으로나 여겼다. 그럼에도 여태 버텨온 곳은 다른 지역에 신도시가 형성된 덕분이리라, 고향의
후생시장처럼. 아무튼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사회의 그런 여유의 회복이 뿌듯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과
거의 발목을 스스로 잡아 앞으로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한 어른이 ‘한(恨)’은 미움을 증오로 키울 수 있으니 작가로서 다른 단어를 찾아보라 말했다. 아직 그 단어를 찾지는
못했지만 과거를 보는 마음과 시각은 진작 달리했다. 흉한 상처라고 할퀴고 뜯기만 해서는 영원토록 아물 수 없을
테니 새살이 돋도록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근대 건축물의 재조명이라는 이름으로 적산까지 보듬기 시작한 것
은 이제 ‘한’을 넘어 앞으로 향하는 큰 걸음일 것이다. 누구도 상처나 아픔이 없지는 않은데, 그 자신감은 참으로 잘
한 일이고 당당하다.
2,000년 넘는 역사에도 뚜렷한 건축 유적이 없는 것은 자재의 문제였다. 일부 성곽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목조
였으니 전란과 화마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을 터. 어쩔 수 없는 여건이었지만 역사를 증거할 뚜렷한 상징이 적었으
니 자긍심은 약하고 외세에는 변변치 않은 역사로 여겨졌을 수 있다. 다행히 이제는 세계의 마천루가 부럽지 않을
만큼 버젓한 건축물이 어깨를 펴게 한다. 다만 유행을 따르는 것인지 경제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수백 년, 천년
을 버틸 건축물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 공공 기관은 오래도록 이어질 우리 역사의 증거로, 뜻깊은 누군가는 스스
로의 명예로 천년의 포부를 품기를 기대한다. 아픈 역사까지 품는 큰마음인데 아무래도 근대 건축물 역시 다수는
재난에 취약한 구조와 자재이기에 든 생각이다.반응형'연구보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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