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문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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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집,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가 보자한국의문화역사 2023. 3. 17. 07:36
이상의 집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에 태어나 28년이라는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이상은 매일이 분주했을 듯하다. 자신의 재능과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펼쳐낸 수많은 문학, 그림, 건축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절로 드 는 생각이다. 경성에서 태어난 그는 3세부터 20여 년간 종로구에 있는 백부의 집에 살았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 터에 ‘이상의 집’이 있다. 2009년 토지를 매입 했고, 서촌 속 쉼터이자 이상을 떠올릴 수 있는 곳으로 운영되다 2018년 12월 재개관했다. 4월부 터는 해설사가 상주하며 짧고 뜨거운 생을 살다 간 이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경복궁 서편에 자리하고 한옥이 많은 오래된 동네지만 뉴트로 열풍을 타고 젊은 세대도 찾는 핫한 지역으로 떠오른 서촌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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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시인, 백석, 김소월, 시 낭독회한국의문화역사 2023. 3. 16. 06:31
조선의 통치 이념을 엮은 법전 에는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다. 조선 시대 담장 너머 세상은 당시 여인들에게는 거대한 차별이자 도전이었다. 당시 장 100 대를 받은 죄인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중한 형벌이었으니 당시 부녀자를 보는 보수적· 사회적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만 해도 남성과 거의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갖고 제사까지 모 실 자격이 있던 여성이 선남후녀(先男後女) 사상과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강조한 조선의 유교 이념 탓에 어떤 공적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풍류와 문학을 당당히 즐기는 조선 최초 여류 시 동인회 삼호 정시사(三湖亭詩社)가 상당한 인기와 호평을 받으며 활동했으니 당시로는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당시 이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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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근대공원의 역사한국의문화역사 2023. 2. 8. 08:07
1920년대 후반 군산부청 신축과 더불어 도시가 명산동까지 확장되면서 군산의 중심지는 영화동에서 월명동으로 이동했다. 1902년 월명산 남쪽 능선에 훗날 군산신사의 말사(末寺)역할을 했던 금도비라사가 축조되었고 1915년에는 월명산, 오른쪽 능선, 군산서초등학교 후면 구릉에 군산신사가 들어섰다. 지금은 이어진 능선 전체를 월명산이라 부르지만 이 때까지만 군산신사 권역은 대사산(大師山)이었고, 1914년에 군산 조계(租界)가 폐지된 이후 신사일대는 '군산공원'이라고 불렸다. 월명산에는 군산신사 외에도 다양한 기념비와 근대 일본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물들이 들어섰다. 1902년에는 상수원 역할을 하는 군산수원지(현재 월명호수)를 조성한 후 제방에 벚나무를 식재했다. 1926년에는 월명산 정상에 '慈雨惠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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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귀하던 그 시절한국의문화역사 2022. 12. 2. 14:49
빠다(버터)’ 반 숟가락, 날달걀 한 개에 ‘소유 간장(양조간장)’으로 비빈 밥 한 그릇을 끼니 삼은 날들이 있었다. 달걀이 벗으면 마른 멸치를 간장이나 고추장에 찍어 반찬으로 삼았다. 그래도 밥은 언제나 따뜻하고 하얀 쌀밥이었다. 학교에 까만 꽁보리밥을 도시락으로 싸 오는 학생이 절반을 넘던 50년 전쯤의 가난을 썰 풀면 여차 꼰대의 궁상이 되기 십상이라 ‘하얀 쌀밥’으로 분칠했지만 허풍은 아니다.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OTT 드라마 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딸 선자를 위해 우리 땅 쌀 맛이라도 보여주고 싶다며 두 홉을 간청하는 엄마, 그에 공감해 일본 관리가 감독해 아무렇게나 팔 수 없는 쌀을한 홉 더 얹어 은밀히 내주는 양곡상의 마음을 보며 맥없이 눈물을 흘렸다. 말했지만 하얀 쌀밥으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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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구진포 장어거리를 걷다한국의문화역사 2022. 3. 13. 14:24
아버지도 어부였고 형님도 어부였다. 살아계셨다면 105세가 됐을 아버지 편무경씨는 1950년대 부터 영산강에서 배를 탔다. 그는 당시 어부들 사이에서 왕초로 통했다. 편성식 씨(68)는 스물다섯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고기를 낚기 시작한 뒤 평생 밭 한뙈기 없이 강 위에서만 살았다. 지금은 나주 구진포에서 장어 식당을 운영하는 어부이다. 구진포 나루터에는 늘 고깃배 서너 척이 정박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편 씨의 것이다. 허가밭은 어부가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100여 명, 죽산보 위로만 35명 가량 있다고 하는데 정작 강에 떠 있는 고깃배를 발견하기란 쉽지않다. 그의 배도 나루에 묶여 있는 날이 대부분이다. 영산강이 '황금강'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그가 어로를 시작한 1970년대에도 그랬다. 황복, 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