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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 근대공원의 역사
    한국의문화역사 2023. 2. 8.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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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후반 군산부청 신축과 더불어 도시가 명산동까지 확장되면서 군산의 중심지는 영화동에서 월명동으로 이동했다. 1902년 월명산 남쪽 능선에 훗날 군산신사의 말사(末寺)역할을 했던 금도비라사가 축조되었고 1915년에는 월명산, 오른쪽 능선, 군산서초등학교 후면 구릉에 군산신사가 들어섰다.

     

    지금은 이어진 능선 전체를 월명산이라 부르지만 이 때까지만 군산신사 권역은 대사산(大師山)이었고, 1914년에 군산 조계(租界)가 폐지된 이후 신사일대는 '군산공원'이라고 불렸다.

     

    월명산에는 군산신사 외에도 다양한 기념비와 근대 일본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물들이 들어섰다. 1902년에는 상수원 역할을 하는 군산수원지(현재 월명호수)를 조성한 후 제방에 벚나무를 식재했다. 1926년에는 월명산 정상에 '慈雨惠民'을 새긴 화강석비를 세우고 군산신사의 일본인 신관이 주관하는 일본식 기우제를 지내도록 했다.

     

     

    또 1935년에는 농장과 정미소를 운영하던 모리기쿠고로의 사유지(현재 월명동 교회터) 정원에 부여 정림사지 오층탑을 본 딴 보국탑을 세우고, 일제의 지속성을 기원하기 위해서 석가. 예수. 공자를 모신 공자묘를 축조했다. 그 해는 '대일미곡수출 최고의 해'로 군산기상대 전면에 개항 35주년 기념비까지 들어섰다. 

     

    쌀 수탈 기념비인 셈이다. 월명산은 조선시대 군산의 주산(主山)으로 묘도 쓰지 못하였고 서낭당이 있어 신성시하던 산이었지만 식민지를 거치며 일제의 다양한 상징 요소가 점유하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일제는 1933년에 군산신사 주변에서 현재 수시탑 (守市搭)지역까지 2만여 제곱미터를 매입해 공원 영역을 더욱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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