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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사랑한 시인, 백석, 김소월, 시 낭독회
    한국의문화역사 2023. 3. 16.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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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통치 이념을 엮은 법전 <경국대전>에는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부녀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다. 조선 시대 담장 너머 세상은 당시 여인들에게는 거대한 차별이자 도전이었다. 당시 장 100 대를 받은 죄인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중한 형벌이었으니 당시 부녀자를 보는 보수적· 사회적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만 해도 남성과 거의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갖고 제사까지 모 실 자격이 있던 여성이 선남후녀(先男後女) 사상과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강조한 조선의 유교 이념 탓에 어떤 공적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풍류와 문학을 당당히 즐기는 조선 최초 여류 시 동인회 삼호 정시사(三湖亭詩社)가 상당한 인기와 호평을 받으며 활동했으니 당시로는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당시 이 모임을 이끌던 김금원은 양반집 서녀로 태어나 “짐승이 안 되고 인간이 된 것은 다행이다. 오랑캐 땅 에 태어나지 않고 문명의 나라 조선에 태어난 것도 다행이다. 그러나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가 된 것만 은 불행이다”라며 여성과 서녀라는 이중적 차별 구조 속에서 느낀 고통을 글로 남겼다. 그럼에도 김금원 은 14세에 남장을 하고 호서와 금강산, 관동팔경과 설악산을 유람하고 기행기를 남긴 도전가였다.

     

    김금 원과의 문학 교류는 당시 사대부 문인 사이에 일종의 팬덤이 형성될 정도로 뜨거웠고, 문학적 성취도 높 게 인정받았다. 삼호정시사는 현재 용산 지역의 삼호정이라는 정자에서 김금원을 중심으로 빼어난 시재 를 지닌 여동생 경춘과 운초, 경산, 죽서와 함께 한강의 운치를 배경 삼아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 의 깊은 슬픔과 한을 시로 승화시킨다. 이후 죽서의 죽음과 김 금원의 이사로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삼호정시사의 많 은 작품은 우리나라 여성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당시 삼호정시사의 분위기는 김금원이 남긴 기록을 통해 생생 하게 현실로 소환된다.

     

    “서로 어울려 노는데 비단 같은 글 두루 마리가 상에 그득하다. 온갖 명언 가구가 선반 위에 가득 찬다. 시를 낭송할 때 그 소리가 얼마나 낭랑한지 쇠를 두드리고 옥 을 부수는 것 같다.” 조선 여류 시인들의 빼어난 모습이 눈에 잡힐 듯 선명하게 스쳐 간다. 어느 시인의 노래 시는 예부터 유독 낭독회가 끊이지 않고 관심을 받는다. 아마 도 다른 문학보다는 음악에 가까운 운율과 질감을 지녀서인지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라디오보다 휴대전화나 TV로 보는 시각 문화가 대세가 됐지만, 시 낭독회는 현대인의 지친 시각을 쉬게 하고 청각을 통해 안식을 취하고 싶은 이들의 바람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해방 이후 시 낭독 문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52년 12월 해 방 후 최초의 대규모 시 낭독회는 부산으로 피란 온 이화여대 가건물에서 열렸다. 그 당시 무려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당대 최고 시인 33명이 참여한 시 낭독회는 지루한 형식과 격 식을 걷어버린 채 시인들의 실험적인 시도로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김수영 시인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단상 전체를 누비 며 낭독했고, 박인환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며 시를 읊조렸고, 김규동 시인은 낭독이 끝난 뒤 원고를 불태우 는 퍼포먼스로 낭독장 분위기를 마치 콘서트처럼 고조시켰다. 이후 시 낭독회는 여세를 몰아 ‘시인만세’라는 이름으로 개최되 었고,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첫 번째 시 인만세 낭독회에는 관객 3,000여 명이 찾아왔고, 1986년 19년 만에 열린 두 번째 시인만세에도 1,200명이, 그리고 세 번째 시 인만세가 열린 1987년 11월 1일에는 초기보다 더 많은 4,000여 명이 행사장을 메웠는데, 이날은 특별히 ‘시의 날’로 제정됐다. 시인만세는 우리나라 시 낭송 문화를 전문적으로 태동시키고 성장시킨 명예시인 김성우가 주도한 대규모 낭송회였다. 1967 년 부산 시 낭독회에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참석한 김성우는 훗날 <시낭송 교실>을 저술해 시 낭송의 기본과 노하우를 정리 하기도 했다.

     

    1980년대 시집이 수십만 부 팔리던 시대를 정점으로 수그러든 시집 판매량은 2014년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는 시를 좋아하는 이들의 관심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젊은 시인들이 인 기를 얻는가 하면, 좋아하는 시를 SNS에 공유하고 소비하는 요즘 세대의 문화와 밀접하다는 분석이 강하다. 또 번잡한 출퇴근 시간에 짧은 시구가 주는 긴 여운은 또 하나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시인선’으로 묶여 판매되는 것은 사실 해외에서는 드문 사례다. 이는 우리 시 문화가 강하고 그 저 변이 제법 탄탄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최근에는 시인 자신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시를 들려주는 시 낭송 플랫폼이 개발돼 화제를 모으기 도 했다. 시뿐만 아니라 시인의 아우라까지 담아낸다는 플랫폼 ‘퍼소나’가 그것이다. 플랫폼 퍼소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역 시인 50인의 낭송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월과 백석이 남긴 근대시의 세계 많은 이들이 소월과 백석의 시를 두고 우리 근대시의 원형이라고 한다. 평안북도 오산고보 동문인 데다 사상과 활동 방향이 닮았던 두 시인은 행적이 겹치는 부분은 꽤 많지만 삶의 운명은 확연하 게 달랐다.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등 수많은 명시를 남긴 소월의 작품은 시에 별 관심 없는 이라도 한두 편 외우고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하지만 직접 편집해 출판한 유일한 시집 <진달 래꽃>(1925)은 출간 당시에는 소월의 기대와 달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소월은 <진달래꽃> 발표 후 경제적 빈곤과 주류 문단으로부터의 소외, 일경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1934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고 만다. 평론가 김우창은 ‘낭만적인 슬픔을 소박하고 서정적 인 시구 속에 가장 아름답게 노래한 시인’으로 소월을 규정했다. 소월의 비단결 같은 시구를 흥얼거 리다 보면 노래와 시가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박연준 시인은 소월의 한에 대해 ‘그 냥은 알 수 없고 이불을 들추면 그제야 드러나는 감정, 숨어 있는 한’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반면 노천명 시인이 쓴 시 ‘사슴’의 주인공이자 모던 보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던 백석은 당시 최 고의 미남 문학가로 유명했다. 내성적 성격의 소월과 보헤미안 기질이 강한 백석은 나아간 행보도 전혀 달랐다. 특히 백석과 기생 김영한의 러브 스토리는 장안이 떠들썩할 정도로 화제였다. 남과 북이 갈리면서 생이별을 하게 되었지만, 김영한은 일평생 백석을 사랑하고 존경한 것으로 전해진 다.

     

    훗날 김영한은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는데, 유언을 통해 대원각을 불 교 단체에 기증했다. 그곳이 지금의 성북동 길상사다. 재산을 기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1,000억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단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시집 한 권을 발표하고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가슴을 적시는 노래를 남기고 떠난 소월과 한 여인을 포함 해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사랑을 새겨 넣은 백석. 왠지 둘의 시가 무척 그리워 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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