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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 구진포 장어거리를 걷다
    한국의문화역사 2022. 3. 1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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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도 어부였고 형님도 어부였다. 살아계셨다면 105세가 됐을 아버지 편무경씨는 1950년대 부터 영산강에서 배를 탔다. 그는 당시 어부들 사이에서 왕초로 통했다. 편성식 씨(68)는 스물다섯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고기를 낚기 시작한  뒤 평생 밭 한뙈기 없이 강 위에서만 살았다.

     

    지금은 나주 구진포에서 장어 식당을 운영하는 어부이다. 

     

    구진포 나루터에는 늘 고깃배 서너 척이 정박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편 씨의 것이다. 허가밭은 어부가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100여 명, 죽산보 위로만 35명 가량 있다고 하는데 정작 강에 떠 있는 고깃배를 발견하기란 쉽지않다. 그의 배도 나루에 묶여 있는 날이 대부분이다. 영산강이 '황금강'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그가 어로를 시작한 1970년대에도 그랬다.

     

    황복, 뱅어, 농어, 갈치, 황새기, 숭어 등 돈 되는 고기들이 쉽게 잡혔다. 장어도 많았지만 장어는 그 시절 국내에서는 그다지 좋은 고기 취급을 받지 못했고, 일본에서 모조리 사들였다. 한 사람이 1톤씩 낚을 때도 있었는데, 아재뻘 친척인 편기복 씨는 금학이라는 일본회사에서 장어를 팔아 논을 닷 마지기나 사기도 했다. 썰물 동안 그물을 갈대밭 강바닥에 쳐 놓으면 밀물때 미꾸라지나 갯지렁이를 파 먹으려는 장어가 새까맣게 걸려들었다.

     

    1981년 12월 목포에 영산강 하굿둑이 완공되며 바닷길이 완전히 막혔다. 그래도 그 후 10년 정도는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점점 돈 되는 고기는 씨가 말랐고 장어가 줄어드는 것도 눈에 보였다. 편성식 씨는 대출을 받아 강가에 2층짜리 집을 지어 식당 간판을 붙였다. 

     

    그게 1990년대 중반, 구진포 일대가 이른바 '3선'으로 제법 잘 나가던 때이다. '3선'은 호남선 철도, 국도 1호선, 영산강 물길 등 세가지 교통로가 모두 통과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목포에서 이곳을 지나지 않으면 서울로 갈 수 없었다. 그즈음부터 한국인들도 장어를 즐겨 먹기 시작하며 구진포는 장어 거리로 소문나 있던 터였다. 그가 기억하는 좋은 시절이다.

     

    10여 년 전, 4대강 사업으로 강이 헤집어지면서 장어는 영산강에서 자취를 감췄다. 강기슭을 따라서는 높은 둑이 쌓였다. 자전거길이라고 했다. 삼삼오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이들이 조금 늘긴했다. 다만 식당 창문에는 더 이상 영산강 황금 물빛이 비치지 않는다. '3선'도 옛말이 됐다. 호남선은 복선화되며 선로를 내륙으로 틀었다. 마을 앞뒤로 큰 도로가 생기면서 옛길은 드라이브 코스 역할만 하게됐다. 게다가 최근에는 나주 연상대교와 무안 몽탄대교를 잇는 강변도로가 놓였다. 

     

    한 때 열 댓 호 이상이던 장어 식당은 이제 그의 집을 포함해 네 곳만 남았다. 장어가 강에서 거의 잡히지 않으니, '구진포 장어 거리'라는 명칭은 허울이다 . " 지금이라도 하구언을 열어불믄 어선 한 척으로 8인 가족도 목고사는 거이 영산강이랑께." 불어온 강바람에 마지막 그의 말이 흐릿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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