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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증평 여행, 김소월 시인을 찾아서, 경암문학예술기념관문화여행기행 2023. 3. 19. 09:00반응형
진달래꽃 너머 김소월 시인을 찾아서 증평에 시인 김소월을 기념하는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 남쪽에 지은 최초의 ‘김소월의 문학 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증평이 충청의 남쪽이었나, 북쪽이었나?’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든 생각은 ‘어 라? 우리나라에 김소월의 문학관이 없었나?’ 하는 것이었다. 처 음의 생각은 청주와 오산까지는 자주 들어 알면서도 그 인근에 자리한 증평군까지는 미처 살피지 못한 탓이었고, 두 번째 생각 은 그의 시 ‘진달래꽃’을 당연히 아는 것처럼 단지 지금까지 찾 아가지 않았을 뿐 그를 기념하는 곳이 이 땅 어딘가에 당연히 있을 거라고 여긴 탓이었다.
주말 내내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치고 난 뒤 도착한 증평은 청 명한 가을 하늘을 뽐내는 중이었다. 증평 여행의 이유이자 계 기가 된 소월·경암문학예술기념관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비. 님이 떠나는 길에 “진 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면서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시를 읊조릴 때마다 매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억지 로 눈물을 참는, 그래서 벌건 두 눈을 한 소녀 또는 소년의 모 습을 떠올리고는 했다. 이 소녀 또는 소년의 모습에 녹아 있을 김소월의 삶을 남몰래 상상하며 기념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기념관 안에는 하늘거리는 진달래꽃처럼 흔들릴 줄 알았던 시인의 마음보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지러운 세상에 정처 없는 인간의 삶보다 앞서 김소월의 시들이 있었다. 작 가 연보에 적힌 내용 대부분도 김소월의 시들이 언제 쓰였는지였고, 스승 김억에게 쓴 편지 내용도, 노트의 필사본도 온통 시에 관한 것 뿐이었다.
1902년 태어난 김소월은 만 18세이던 1920년 문예지 <창 조(創造)>로 등단한 후, 1934년 12월 24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근대 의 어지러운 풍파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시 세계를 펼쳐 나 갔다. 비록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은 <진달래꽃>이 전부였으나, 지난 세월 동안 무수하게 쏟아진 김소월의 시집들을 기념관에서 마주하 며 이 땅에 자리한 그의 시가 얼마나 깊고 오래된 것인지 어렴풋하 게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놀라운 이야기는 함께 전시를 돌아본 소월·경암문학예술기념관의 유금남 관장에게 들을 수 있었 는데, 현재 우리가 김소월의 얼굴이라 믿는 사진 속 모습은 실은 진 짜 김소월의 얼굴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깜짝 놀라 절로 귀가 쫑 긋 섰다. 본래 평안북도가 고향인 김소월은 그가 일군 삶의 터전도, 문학의 흔적도 모두 북쪽에 남아 있다고 했다. 분단된 남쪽 땅에서 지구 반대편 나라의 소식보다 더 듣기 어려운 게 북쪽의 이야기였 고, 결국 김소월을 그리워한 남쪽의 사람들이 유일하게 남한에 남 아있던 셋째 아들 김정호 씨와 손자의 얼굴을 토대로 김소월의 존 재를 미루어 짐작해 그린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김소월의 얼굴이 라고 했다.
‘진달래꽃’ 시는 눈을 감고도 외웠지만, 정작 김소월의 삶 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히 알기 어려웠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오직 시로만 회자되었기에 이토록 뿌리 깊게 민족 시인 김소월이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월·경암문학예술기념관을 지은 경암 이철호 선생은 소월의 셋째 아들 김정호 씨가 살아있었을 때 한의사-환자로 연이 닿은 것을 계 기로, 몇 년 전 유족으로부터 남한의 소월문학기념사업회를 위임 받았다고 한다. 드라마로도 만든 대표작 <태양인 이제마>를 비롯해 평생 소설과 수필을 쓰고 무료 문학 강좌를 열며 개벽하듯 바뀐 스 마트 세상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고 문예지 <한국문인>을 발행하는 등 2층 기념관을 통해 본 경암 선생의 삶은 김소월의 이름을 더욱 단단히 새겨주리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김소월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85년, 기념관을 뒤돌아 나오며 다른 무엇보다 가슴 뭉클한 것은 이제 김소월을 생각하며 발길을 향할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활짝 핀 꽃을 꽃이라 불러주는 이의 역 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고마운 일인지 새삼 눈앞이 어른댔다.
시가 되는 증평의 풍경
증평에서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다가 이왕 김소월을 만났으니, 그의 시 속에 담긴 마음을 헤아려보기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모든 예술가가 그렇듯 김소월도 시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달리했고, 같은 슬픔이라도 ‘진달래꽃’에서는 꾹 참았다면 ‘초혼’에서는 괴로움에 못이겨 소리쳤다. ‘산유화’에서는 나라는 존재의 피할 수 없는 고독을 되뇌었고, ‘엄마야 누나야’에서는 그저 엄마, 누나와 행복하게 살고 싶은 순수한 동심을 수줍게 꺼내 보였다. 그 마음을 더듬어보고자 소월·경암문학예술기념관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독립운동가 원명 연병호 선생의 생가로 향했다. 애 초에 초가 2칸이 전부였던 집을 연병호 선생이 직접 재목을 잘라 다가 다시 지었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한 바퀴 훌쩍 집 주위를 돌고 나면 무언가를 더 보고 싶어도 볼 것이 없을 만큼 작았다.
일제 강 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초대 제헌 국회의원과 2대 국 회의원을 지내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감찰관으로 활동 했다는 선생이 세상을 떠나며 이 작은 집에 남긴 것조차 두루마기 한 벌과 고무신 한 켤레뿐. 나라 빼앗긴 설움에는 비분강개하면서 도 작고 초라한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않던 선생의 삶에 ‘내 집’이 중요한 요즘 사람은 투덜거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지만, 선생의 공덕을 기리며 마을 사람들이 세웠다는 생가 뒤편의 커다란 삼문과 2016년에 꾸민 인근의 항일역사공원을 작은 집 대신이라 여 기며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럼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동심을 깨우는 이야기만 한 것이 없을 듯싶었다. 이상배 작가 가 자신의 고향인 증평 은행정 마을에 예부터 전해오는 설화를 소 재로 지었다는 동화 속 도깨비를 보러 가기로 했다. 좋아하는 아가 씨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고 그저 붉은 홍시만 따주었다는 베틀 도 깨비, 어릴 적 거짓말을 했다가 깨비골에서 쫓겨난 경험 때문에 학 생 도깨비에게 항상 ‘거짓말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훈장 도깨비, 객 지로 떠난 가족을 기다리며 살림하는 멍석 도깨비 등 은행정 마을 회관의 앞마당 곳곳에 선 익살스러운 도깨비들 모습에 피식 웃음 이 났다.
담벼락마다 개성 넘치는 도깨비 벽화와 함께 마을 깊숙한 곳에는 도깨비 옹달샘과 도깨비굴도 있었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 있다>처럼 마을 사람이 모두 잠든 밤이 되면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도깨비들이 마을 곳곳을 누비며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고 굴 속 깊은 곳까지 탐험할 거라 상상하니, 무섭게만 느껴지던 시골 마 을의 밤이 되레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높고 푸르른 하늘이 붉게 물드는 첫날의 저물녘, 요즘 증평군립도 서관과 함께 증평의 문화 1번지로 불리는 보강천 미루나무숲을 걸 었다. 꽃과 나무, 잔디 사이를 몇 걸음 걷다 멈추고, 다시 몇 걸음 더 걸으며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곧게 뻗은 미루나무의 끝을 향해 있는 힘껏 고개를 젖히고 맨드라미, 봉선화, 목화 등 팻말에 쓰인 꽃들의 이름을 가만 불러보았다. ‘꽃 검색’을 이용해 처음 보는 꽃의 이름도 찾아 읊으며 기억해보려고 애썼다. 김소월의 시 ‘산유화’에서 꽃을 좋아해 산에 산다는 “산에서 우는 작은 새”는 어쩌면 고독해 우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꽃의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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