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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녹원을 걸으며
    문화여행기행 2023. 4. 2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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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고 자라며 익숙한 건 소나무였다. 소풍을 가도 송림이고 동해로 놀이를 가도 솔숲이었다. 나고 자란 곳의 기후 조건탓에 대나무숲은 머릿속에 없었던 셈이다. 하긴, 이 땅의 산 어디를 올라도 소나무가 주인이요 애국가에도 남산 위의 소나무 아닌가. 그러니 소나무숲만 숲인 줄 알았다고 한심하다 여기지는 마시길.


    죽녹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그 푸른 기운의 빽빽함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기가 눌려 말없이 걷는데 제법 드센 바람이 불어오니 숲이 내는 아우성은 실로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장대비가 내리고 댓잎이 받는 소리까지 더하면 아예 신비롭지.' 일행의 말에 숲의 아우성을 들으며, 댓잎의 화음을 상상하며 걷는 동안 평소에는 하지 않던 진중한 사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솔숲에 둘러싸인 절을 찾아 스님에게 그 낯선 사념의 경험을 말씀드렸다. 스님이 씩 웃으시고 답해줬다, 숲은 깊은 생각의 공간이라고. 찾아다니며 생각을 경건히 하면 그 숲마다 다른 갈피를 열어줄 것이라고도 덧붙이셨다.


    경주 대릉원 솔숲에 새벽안개가 드리우면 신비하고 경이롭다. 그 숲길을 걷노라면 생각은 장엄하나 푸근하게 길을 잡는다. 다시 찾은 죽녹원을 걸으면서는 날카롭게 벼린 기상의 길을 엿보았다. 눈이 내리면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을 찾게 된다. 매서운 추위보다 잃어버린 옛인연의 추억에 더 서늘해지며 소중함을 지킬 겸허를 생각한다. 숲은 철학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성소다.

     

    인도의 버석한 길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고행하는 수도승의 행보도 보았다. 불교가 태어났지만 여전히 힌두교가 주류다. 선(禪)은 숲이 우거진 깊은 산이 본향인가. 감히 철학이나 종교를 거론할 깜냥은 못 되지만 땅과 환경이 사람의 생각을 조금씩 다르게 하는 건 분명하지 싶다. 아침 운동을 나가면 아카시아 무리가 하얀 꽃을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어릴 적 학교 뒷산은 온통 아카시아였다. 줄기는 휘고 가지는 제멋대로 뻗은 데다 뾰족한 가시까지 사나우니 꽃향기 그윽한 5월을 제하면 외면했다. 벌목과 전쟁으로 황폐했던 산야에 속성수로 급하게 조림했고, 다른 수목들이 자라 숲을 이루자 제거의 대상이 됐지만 질긴 뿌리의 뻗댐으로 그나마 군데 군데 모여 있다.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으며 문득 생각 했다. 환경의 역습은 인간의 배신이 빚은 업보인데 잊은 듯 꽃을 피워 벌을 부르는 저 아카시아는 참으로 너그럽지 않은가 하는.

     

    근처에도 솔숲은 있지만 1년이 넘도록 대나무숲도 자작 나무숲도 찾아가지 못했다. 그 탓인가, 꽤 오랫동안 머릿속이 산만해 무엇에도 집중 못하고 있다. 무더위가 몰려들기 전에 다녀와야 할 듯한데, 이럴 때는 죽녹원의 날카로운 기상이 십상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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